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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나(4) '정말 몰라요' 무슨달 2000.5.4(목)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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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나(4)

정말 몰라요

무슨달

2000.5.4(목) 15:08


                                 노래와 나(4)


     내가 살아온 긴 시간(쩝 어르신들이 보면 노하시겠지만 여긴 별로 없으시겠지…) 중에 가장 아름답던 시절이 중학 시절이다. 불량스런 학생으로 분류되었고 실제로도 학생으로는 해서는 안될 많은 일들을 했지만 내겐 가장 순수했던 때였다. 친구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의리도 있었고 철은 없었지만 정말 내겐 눈물 나게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은 고등학교 시절을 잊지 못하지만 내가 중학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은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중학 시절 내내 학교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처럼 여겼던 것 같다. 거기엔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생략하련다. 다만 친구들과 어울려 쏘다니던 그때의 아름다움은 범생들은 잘 모를 것이다. 못된 짓을 하고 쏘다닌 것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도 몰랐고 그만큼 호기심이 너무 컸었고 너무도 순수한 아이의 마음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중학교 입학식 날 난 생전 처음 짜장면을 맛볼 수 있었다. 아… 그 맛이라니… 세상에는 이런 맛도 있었구나. 중학교 때 처음 짜장면을 맛볼 만큼 가난했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늘 부족했지만 그걸 원통해할 만큼 어른스럽지도 않았고, 커서도 별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누구의 말처럼 좀 불편할 뿐이었다. 지금 나이에 와서야 그때 우리 집은 가난했었구나고 생각할 뿐이다. 암튼 짜장면에 대한 첫 기억은 잊혀지질 않는다. 이렇게 맛있는 짜장면에 대한 노래가 한 곡도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우리를 가르치시던 음악 선생님은 꽤 실력이 있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칭찬하신 여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이름은 * 정자 셨는데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이름을 소개하자 우리는 와아 하고 웃었다. 올챙이(?) 생각이 난 것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라서 친구들끼리 모여 국어 사전에 나오는 여성의 성기에 대한 설명을 몰래 보며 낄낄거리던 때여서 그랬던 것 같다.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엄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 시간이면 무섭게들 음악실로 뛰어가 선생님의 치마 밑을 훔쳐보곤 했다. 음악실의 칠판은 높게 달려 있어서 선생님은 미리 판서를 하기 위해서 의자 위에 올라가 판서를 하셨는데 우리 개구장이들은 앞다투어 의자 밑으로 뛰어가 엎드렸다. 그래도 선생님은 별로 화를 내지 않으셨다. 하긴 열 네살짜리들의 그런 행동을 귀엽게만 생각하셨을 것이다. 부끄럽기도 하셨겠지만…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 중 내가 좋아하던 노래는 스와니 강과 보리수였다. 커서도 잔잔한 노래가 좋은데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중학 시절 초반부는 가요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조금씩 지금의 얼굴 형태를 갖추던 이학년 중반부터 삼학년 때의 기억이 조금 있는데 흠… 생각해보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중학교 입학한 후 집과 학교가 거리가 멀어 우리는 이태원으로 이사를 했다. 이태원… 우리 조상들이 몇대 동안 살던 곳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구한말 군대의 훈련대장이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일제 시대 때 독립군은 아니셨지만 소규모 집단에서 일제에 항거하셨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힌 할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모든 재산을 압류 당하고 숟가락 하나 없이 쫓겨나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땅이었던 이태원 너른 들을 늘 바라보기 위해서 건너편 한강변 산속에 움집을 지어 흑석동에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그때의 땅을 조금이라도 찾아서 근 육십 여년 넘게 지속된 우리 조상들의 아픔을 달래줄 사당이라도 지을 생각에 그곳 번지를 찾아 봤는데, 난 포기해야 했다. 지금은 대형 의류 상가와 호텔과… 그걸 찾으려면 수 조, 또는 수십 조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단 돈 1억도 없는 사람이 쩝… 내 후손들의 숙제다… 흠… ‘왕년에 우리 집엔 금송아지가’ 이러고 넋두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야기가 한참 빗나갔다. 이태원에서 한 일년 살다가 보성여자중고등학교 밑 해방촌으로 이사갔다. 그곳에서 좀 껄렁대는 형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 형에게 배운 노래 한토막에 나는 으쓱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이상한 노래를 알고 부르는 것이, 어렸을 때 담배 피우고 술 먹던 것을 자랑처럼 여기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앞 대목은 생각나지 않는 그 당시의 노래가 있다. < ~ 알 러뷰 유 유 러브 미 내가 알게 뭐에요. 싫어요. 싫어요. 저 정말 싫어요.> 후반부가 이렇게 끝나는 노래인데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곡에 가사를 부친 노래인데 저질스러운 노래였다. 이 고운 윈버드 사이트에 이런 가사를 써야할진 모르지만 그것도 인생사에서 벌어졌던 일이니 가급적 좋게 처리하며 써보겠다. 흐흐. 당시 똘만이들의 노래 행태는 어땠나를 알 수 있는 노래니까. <해방촌에 날라리는 영복이 까이 차차차, 하루에도 열 # 스무 #  일주일에 ### 탕~> 그 담이 뭐드라?? 아 늙긴 늙었나보다 후반부가 기억나질 않는다. 그때의 저속한 표현으로는 여자 친구를 까이 또는 깔치라고 했고 순경은 짭새, 방범 대원은 방돌이, 선생님은 꼰대라고 했다. 기억들 나시져? 히히… 흠흠… 저속한 노래를 소개하다 보니까 또 하나 생각난다. 난 나중에 내가 만났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내게는 진정한 친구들이 남들보다 많은 편이다. 내가 가진 재산은 그들이고 내가 인생을 산 보람 중 큰 부분이 바로 그 친구들과의 만남이다. 당시의 친구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스물을 넘기면서 만나게 된, 철이 들면서 만나게 된 멋진 친구들이다.) 책으로 펴낼 생각인데, 그때 꼭 쓰려고 하는 노래가 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어떻게 그런 상스러운 노래를 동네 아이들과 불렀는지 참 알 수가 없다. 내가 그 노래를 여과없이 소개하는 이유는 당시의 풍토(다른 환경의 분들은 모르실 수도 있지만)를 리얼하게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그때는 뭔 욕들을 그렇게 했는지… 그냥 친구들하고 얘기하면서도 이 새끼 저 새끼 뜻도 모르면서 *할 놈 뭐 어쩌구 그러던 때였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1963년도 경의 풍토 중 한 부분이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는 보통의 어른들과는 아주 다른 화려한 옷에 짙은 화장을 정말 멋진 아가씨(그때는 아줌마라고 불렀겠지만)가 가끔 있었다. 술집 작부도 아니었고 그냥 부유한 집의 따님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동네 꼬마들은 그런 아가씨가 지나갈 때마다 그 뒤를 따르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 추신: 제발 삭제하지 마시길…> “솥 때워요~ 냄비 때워요~ 지나가는 양** ** 때워요~ ” 하… 그때는 그랬다… 뜻도 모르면서 아마도 형들에게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양색시들을 비아냥 거리던 그런 노래인 듯하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미군 부대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런 노래를 알 수 있었을까. 가끔씩 <헬로 기부미 쵸코렛!>하고 국군묘지 앞으로 지나가는 미군 트럭에 손벌리던 그 시절, 그 가난하고 힘없던 대한민국…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 행복에 겨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서 남북통일 되어 힘있는 나라로 세계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며 살아야지… 곧 그런 날이 오겠져?


<추신 : 쩝, 포크송 사이트에 이런 잡설이 어울리려나…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 다음 번에 포크송에 관련된 이야기를 올릴게여 히히. 이제 나이가 쫌씩 올라가잖아여. 청개구리나 쉘부르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접했던 포크송 이야기 기대해 주시길!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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