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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의 '사랑스런 그대'와 삽화 이병세 2000/12/24(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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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의 '사랑스런 그대'와 삽화

이병세

2000/12/24(일) 20:07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창연한 빛으로 젖어 있는 젊은 날의 삽화가 있기 마련이다. 

20년전 이맘 때 쯤이던가, 난 한 어여쁜 아가씨와 부산 남포동의 한 음악다방에 앉아 있었다. 난 그녀를 협박과 애원이 뒤섞인 목소리를 실은 전화로 윽박질러고나서 불러낼 수 있었다. 

담배를 빨아들이는 주기가 짧아지고 숨길은 가리사니를 잡지 못했다. 내 심폐기능이 허용하는 호흡의 용량을 벗어나게 생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생맥주잔의 손잡이만 만지고 있었다. 어쩜 내가 풍기는 분위기가 촌스러움이 배어든 비장감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어색한 순간을 빨리 가벼운 마침표로 마감하고 싶다는 호소를 눈길로 보내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런 그녀를 그 자리에 불러냈을까? 

난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여유를 가지고 겸연쩍게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땐 난 그런 여유가 없는 순진한 촌놈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기까지 정작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정녕 그녀에 대한 나의 쏠림은 상상이 만든 결정화 작용이었는지 모른다. 난 불행히 아직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모른다. 질정없이 내달리던 내열정이 정착할 곳을 몰라 헤매다 우연히 그녀에게 불시착했을지도... 


난 서서히 취해가고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그녀를 불러낸 이유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난 도회지의 세련됨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을 그녀에게 신파조로 비쳤음이 분명한 고백을 늘어 놓고 있었다. 


'난, 널 좋아했따!' 


'그러나 이젠 가야겠다. 난 이제 나의 가능성이 거의 소진된 존재인 것 같다.' 


그녀는 듣기 거북해했다. 그러나 나는 준비된 연극대사투의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라. 난 세월이 흐른 후, 이 순간을 되돌이켜 볼 때 내가 널 좋아했던 걸 적어도 감정의 무의미한 손실로 여기지는 않으리라' 


그녀의 미간이 약간 움찔했다. '어쩜 내 젊은 날의 담담한 삽화로 여기는 여유를 가질 날이 반드시 올 꺼니까.' 하하하...난 절제할 자신도 없는 감성을 붙들고 그녀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던 것이다. 뻔한승부를 가지고. 

...... 


난 준비된 말을 마치고 나자, 멜로드라마의 쓸쓸한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재빨리 내 말의 여백을 채웠다. 


휘모리조로 휘감긴 나의 열정이 마침내 눈이슬로 가라앉았다. 

...... 

그 어색한 순간에 내 열정의 뇌관을 건드린 것은 노래였다. 그 노래! 


'자 이제 안녕하며 돌아서야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윤형주의 맑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땐 왜 그리 내 폐부를 칼날같이 파고드는지... 


난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의식의 잠금장치를 놓아버렸다. 테이블 위에 고개를 쳐박고 진한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의 손이 날 잡았다. 

말이 없었다 


윤형주는 그 '사랑스런 그대'를 아직 부르고 있고, 시간은 마디게 가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옮겨와 날 감쌀 때까지 노래는 이어지고 있었다. 난 눈물이 마를 쯤 고개를 일으켜세웠다. 최후의 인간적인 예의를 다한 그녀를 이젠 보내야 하는 순서가 남아있었을 뿐이다. 

밖으로 나왔다. 난 그녀에게 악수를 주었다. 그건 준 것이다. 어쩜 그녀는 그걸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난 그녀를 내 젊은 날의 서투른 항해의 뱃길에서 떠나 보냈다. 



추신 : 오늘, 난 이 노래를 무척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없군요. 어디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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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 2000/12/24[20:16]

 윤형주의 '사랑스런 그대' 들어 보세요. 



이병세 2000/12/24[20:42] 

 홈지기님, 너무 고맙습니다. 난 이 노래를 듣고난 이 순간, 너무 행복합니다. 무척, 님의 따뜻한 마음이. 홈지기님,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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