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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새(음악한곡의추억)

노래와 나(끝) '비' 무슨달 2000.5.5(금)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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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나(끝)

무슨달

2000.5.5(금) 02:43


                                       노래와 나(7)


   포크 송에 관련된 멋진 이야기나 포크 역사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라면 더 좋았을텐데 노래와 관련된 (때론 별로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애쓰시는 관리자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귀한 페이지를 너무 개인적 이야기로 도배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또 정서를 해서 올린 글도 아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구 쓴 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대충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음에 시간이 많이 남을 때 잘 정리해서 아름답고 유익한 글이 되도록 만들어 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 내가 올린 글들은 조잡하지만 내 인생의 노래에 대한 초고가 된 셈이다.


   내가 포크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인 71년도(70년인가? 숫자 따지는 거에는 언제나 자신이 없고 취미도 없다.)에 처음 기타를 접하게 되면서가 아닐까 싶다. 일반 가요와 더불어 방송을 통해 포크 음악이 조금씩 소개될 때니까 아마 그때이지 싶다.


   난 작은 형의 심부름으로 남영동 어느 악기사에서 기타를 사왔다. 2500원을 주고 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장 싼 것을 샀다. 형도 물론 기타를 처음 배울 때였고 거의 독학이었다. 나도 그 곁에서 조금씩 기타를 배웠다. 도레미부터 책을 보고 하나씩 기타줄을 튕겼다. 그리고 소위 코드라는 것을 익혔고 주법도 하나둘씩 배워나갔다. 손가락 끝이 매우 아팠다. 물집이 생기고 몇 번인가 벗겨졌던 것 같다. 곧 굳은 살이 박히고 익숙해졌지만… 처음 기타를 배울 때 무슨 곡을 쳤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연가였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가 아삼삼하다. 얼마 지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르페지오 주법을 마스터 했을 때 후~ 기분 참 좋았다.


    그 때는 캠프송이라 하여 따로 노래책이 나왔었다. 나는 그 책보다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동요와 가곡이 한데 묶여진 두꺼운 책을 더 좋아했다. 부를 노래가 아주 많았으니까. 물론 캠프송 노래책도 두어 권 가지고 있었다. 

    “한 촌 사람 하루는 성내 와서 구경을 하는데~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 별별 것 다 봤네~ 맛좋은 냉면이 여기 있소. 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요~” 

또 김홍철 씨의 <아름다운 베르네>도 좋아했다. 이 사이트에 이 노래가 있는지 조금 후에 확인해봐야겠다. 갑자기 듣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베르네 맑은 시냇물이 넘쳐 흐르네~ 새빨간 알핀로제스 이슬 먹고 피어 있는 곳~ 다스오버랜 야 오버랜 나의 사랑 베르네~ 후디리리요 후리리 후디리리요~ 후리리~”

    투코리언즈의 <언덕에 올라>도 단골 메뉴였다. 나중에 윤형주의 <즐거운 자전거 하이킹>, 김세환의 <목장길 따라> 등도 내 캠프송의 범주에 들어왔다.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차츰 포크송을 좋아하게 되었다.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 양희은의 <작은 연못>, 그리고 송창식의 첫노래 <창밖에는 비오고요>까지… 


    나는 크면서 송창식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그때 어느 음악 잡지에선가 송창식 씨에 대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의 어렸을 때 별명이 <송아지>였다는 내용도 있었다. 거기엔 송창식 씨의 재미난 일화가 몇 개 실려 있었다. 인천인가가 송창식 씨의 고향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몇 학년 때인가 어느 학교로 전학을 갔던 송창식은 학년이 바뀐 첫날 새로 담임을 맡으신 어느 여선생님의 이름 때문에 깔깔 웃다가 매우 맞았았는 내용도 있었다. 그 여선생님 이름이 무슨 <공순>이었는데, 인천에 살던 송창식은 공장 다니던 사람들을 속되게 칭한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우스워 혼자만 크게 웃다가 매우 맞았다고 했다. 또 기타를 처음 배울 때 기타 살 돈이 없어서 나무판자로 직접 기타를 만들기도 했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형의 심부름으로 샀던 그 기타는 3,4년 동안 내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린 아이의 독학이라서 실력은 형편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나중에 기타의 네크 부분이 안으로 점점 굽어 제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자, 형과 나는 기타 아래 부분에 못질을 하여 네크 부분에서부터 줄로 당겨 굽은 것을 보완해서 기타를 치곤 했다. 처음엔 그런 임시 방편이 훌륭했었는데 워낙 싼 기타라서 그런지 점점 더 굽었고 그럴 때는 기타 뒷편으로 이 책 저 책 두꺼운 책을 줄에 끼워넣어 굽은 것을 더 보완했다. 나중에는 방석이며 이것저것의 도구들이 동원되었다. 마치 배불뚝이처럼 된 모양없는 기타였지만 (따라서 치기도 무척 힘이 들었다.) 내겐 정말 좋은 친구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그야말로 들로 산으로 그 기타를 들고 나가 하루종일 노래를 불렀다… 어떤 날은 노래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엉엉 운 적도 있었다… 허~ 이상한 일이다. 전혀 슬펐던 것이 아닌데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노래를 영 못한다.


    중학교 때와 졸업 후 몇 년 동안 노래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잘 정리해서 쓰면 몇 페이지 분량이니 아쉽지만 이만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보고 싶은 또 한 명의 여학생 이야기를 하면서 이만 정리할까 싶다.


     우리 처음 만난 날 비가 몹시 내렸지

     쏟아지는 빗속을 둘이 마냥 걸었네

     함빡 젖은 머리에 물방울이 돋았던

     그 애 모습 아련히 내 가슴에 남아 있네…


     그 당시 내 친구의 집은 이촌동이었다. 나는 가끔 그의 집에 놀러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그 겁나는 여학생을 처음 만났다… 왜 무서워 했냐면 나만 보면 졸졸 따라와서였다. 참 이쁜 여학생이었다. 솔직히 내 맘에도 쏙 드는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너무 적극적이라서 난 좀 무서웠다. 그 여학생은 내 친구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갈 때마다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무슨 맘을 먹었는지 그 여학생은 내 뒤를 늘 따라왔고, 난 무서워서 잰 걸음으로 내 친구의 집으로 얼른 들어갔다. 내 친구에겐 말하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면 말도 못하고 마음 속에만 품는 법인가 보다. 더구나 난 냉담했지만 ‘자’의 남자 친구가 아닌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이촌동에 있는 내 친구의 집에 갔다가 친구가 없어서 그냥 학교 부근으로 걸어오던 중이었다. 이촌동에서 후암동은 꽤 거리가 되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큰 비도 아니어서 그냥 맞고 걸어가고 있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워 뒤를 흘낏 보니까 언제 나타났는지 그 여학생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 비는 내리고… 가슴이 뛰지는 않았지만 그 묘한 기분이라니… 아주 가까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한 10여 미터 뒤에서 내가 멈추면 그 여학생도 멈추고 내가 다시 가면 그 여학생도 다시 따라오면서, 그녀마저 그 비를 다 맞고 후암동까지 그렇게 걸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용기도 없었구나 싶다. 다른 것엔 대담한 척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 어디가 좋아서 그랬을까? 지금은 참 궁금하고 또 보고 싶다… 왜 난 그 여학생에게 한 마디도 못했을까?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내 친구들 여럿과 함께 이촌동 그 친구에 집에 갔다가 그날도 후암동까지 걸어가고 있었는데, 하~ 뒤를 보니 또 그 여학생이었다. 내 친구는 진작부터 그런 낌새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나를 부추겼지만 난 관심이 없는 척했다. 밥퉁이 같으니라구. 친구들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불렀고 그 여학생과 우리는 함께 후암동까지 왔다. 학교 근처에 왔을 때, 친구들이 내게 못된 제안을 했다. 아아 그럴 맘은 정말 없었건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 여학생을 데리고 단골 중국집에 갔다. 우리 인원이 그때 십여 명 되었었다. 여학생의 그녀 혼자…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한 여학생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들이 가면 늘 내주던 이층 방에 올라가 짜장에 짬뽕에 그리고 빼갈에 또 군만두에 그런 것을 잔뜩 시켰다. 그녀는 당연히 내 곁에 앉아 다소곳이 있었다. (다소곳이라는 표현이 이상할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끼가 많은 여학생에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여학생이 끼가 많았으리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여학생이 어떤 여학생인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를 좋아했다면 틀림없이 착하지 않았을까? 후후 농담이다.) 우린 오랫만에 포식을 했다. 그리고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한두 녀석이 눈짓을 했고 우리는 하나둘씩 슬쩍 중국집을 빠져 나왔다. 나중엔 그녀만 남겨두고 모조리 중국집에서 나와버렸다. 아… 생각해보면 너무나 미안한 일이다. 그녀는 음식값을 감당할 만한 돈이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그런 큰 돈을 가지고 다닐 리가 없다. 못된 놈들 같으니라구…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곧 우리는 졸업을 했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뜸해졌으니까… 그녀는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 그 여학생은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이다. 속으론 아주 좋아했으면서도 왜 그 여학생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너무 이쁘게 생겨서 좀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그렇다고 친구들의 그 같은 제안을 혼쾌히 받아들이다니. 그게 의리라고 생각한 어린 때였다.


       그녀는 삼각지 부근에 있는 모 여자 중학교에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여학생의 이름은 <미#>이다. 이름이 너무 특이하여 늘 기억하고 있는데 성을 알 수가 없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꼭 연락하길 바란다. 실명을 밝히는 내 주책없음도 용서하길 바란다. 그만큼 그에게 미안해서이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만나서 용서를 빌고 싶다. 


      가끔씩 비가 내리는 길을 우산없이 걸을 때가 있을 때면 그 여학생이 생각나고 나는 김세환의 <비>를 흥얼거린다. 참 철없던 때였다. 그 여학생은 잘 살고 있을까? 아마도 그녀에게 미안한 만큼 내가 그녀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용기가 내게 있었다면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어리석고 어리고 철없었지만 너무도 깨끗한 마음의 시절이었다. 지금은 남들에게 조심하고 좋게 보이기 위해서 더 애쓰는 까닭에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지금의 나는 솔직히 거의 그렇지를 못하다. 어떻게 그때만큼 순수하고 착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어린 때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옛날의 꿈을 찾아 이곳 윈버드에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있는 것 같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 남을 의심할 줄 모르던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겉으로는 웃어도 속에는 높은 담이 있고 결코 그 담을 헐지 않게 되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들에겐 결코 웃지 못하는 것이겠지. 욕을 하고 더러 개구진 짓을 하였어도 그때의 우리들 모두는 정말 밝은 마음들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별을 보면 기뻐지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그런 어린 시절 마음이 그립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한때는 어린 마음이었다는 것은 그래도 꿈이 남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좋은 밤… 모두 좋은 꿈들 꾸시고… 모두 모두 정말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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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수 2000.7.30(일) 22:33


노래와 나 글 참 잘읽엇읍니다

저도 이상하게도 다른건 기억못해도 노래가사는 기가 막히게 기억합니다

길을 가다 좋은 노래가 흘러나오면 다 듣고 했지요

노래와 같이한 70년대 이젠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글중에 언급하신 노래는 서유석 노래이고 방송금지 됐지요


" 극장가자 다방가자 그런말씀 마세요

 시골서 올라온지 이제 겨우 한달반

 아이러브유 유러브미 내가 알게 뭐예요 "


이태원동 남영동 등 어릴때 싸돌아다녔던 동네 이름 반가웠읍니다.

저도 님과 같은 세대로 64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시험

마지막세대이지요.


..기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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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달 2000.8.5(토) 02:24


안녕하세요 기정수님


답이 아주 늦었습니다. 자동 메일로 님의 글을 진작 읽었으나 제 컴퓨터에 문제가 있었고 이 일 저 일로 경황이 없어서 이리 되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영동 이태원.. 말만 들어도 아이적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입니다.

생활하다가 이태원이 고향이라든가 그곳에서 살았었다거나 직장이라도 그곳에 있다고 누군가 말하면 전 좀 흥분해서 대화가 아주 길어집니다. 무척 반갑고 누구든 금새 친구 같아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제 반응의 속내를 이해하진 못하죠.


아무튼 참 반갑습니다. 마지막 고등학교 시험 세대라시니 저와 비슷한 세대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험을 보았고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한번인가 두번인가 더 시험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후에 저는 고등학교 시험을 보지 못하였거든요. 님의 존함이 익숙한 듯도 한데 아마도 남영동 이태원의 이야기 때문에 친근함이 느껴진 탓인 듯합니다.


파리제과 오른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당시로서는 희안한 자동 판매기 형식의 아이스크림을 팔던 빵집이 하나 있었는데.. 제 무례함 때문에 어느 여학생이 그곳에서 울었지요. 참 철없었던 것 같습니다. 건너편 성남 극장에서 용중 사거리로 가다보면 이층에 오락실이 있었지요.. 자동차 운전 오락 기억나시죠? 투명 아크릴 상자 안에 들어있는 장남감 같은 빨간색 자동차를 핸들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오락기였죠.. 헬기도 있었지요.. 정확하게 착지하면 더 오래할 수 있는 오락기요.. 뮤직박스라고 하나요 쥬크박스라고 했나요?   동전을 넣고 음악을 듣는 오락기도 있었지요.. 주로 팝송이었지요.. 팝송에 관한 제 음악 수준은 고고를 출 수 있는 춤곡이었기에 주로 ccr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용중 사거리에서 남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만두집이 있었는데 예전에 우리 옆집에 살던 아저씨가 그 가게를 운영했었지요.. 팥 앙꼬(그때는 그렇게 말했었지요)가 들은 찹쌀... 모라구 불렀는지 갑자기 아물아물 합니다.. 설탕을 입힌 그 달디단 빵도 팔았었지요.. 그 건너편에 탁구장이 있었고 그 길 앞으로는 흰 깃이 유난히 빛나보이는 수도여고 여학생들이 늘 나플거리고 오고갔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골목이 하나 있고 그 골목 끝에는 삼광국민학교가 있었죠... 삼광국민학교 위로 올라가면 서울역으로 넘어가는 대로가 나오고 그 어디쯤 단골 중국집이 있었지요... 후후... 그냥 우리만의 기억 속에 있는 길을 함께 걷는 기분으로 주절대 보았습니다...


제 글에 대한 고마운 소감 말씀 감사드리면서.. 늘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큰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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