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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의 '사랑이야', 그리고... 김혜진 2000/10/13(금)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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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의 '사랑이야', 그리고...

김혜진

2000/10/13(금) 15:34


여고 1학년, 입학식 다음날인 금요일 6교시는 한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선 첫인사를 마치신 후 우리 학교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시고 곧 교과서를 펼치셨습니다.

키 순서대로 뒷자리에 앉았기에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34번 김 혜진이! 거기 '언어 활용' 한번 읽어 보세요." 

깜짝 놀라 일어서다가 스타킹이 의자 못에 걸려 찢어졌습니다. 한자 섞인 '언어 활용'은 무사히 읽었지만 얼굴이 붉어져서 혼났습니다.

그날의 만남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1주일 뒤 한문 시간... 선생님께선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의 유래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알고 있는 유래와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망설이다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왜 그러는데요?" "제가 알기에는..."

'하나수첩'을 꺼내어 겁없이 수첩 한귀퉁이에 있는 '와신상담'의 유래를 읽었습니다. 

눈이 동그래지는 친구들, 쑥스러워하시는 선생님,

그러나 선생님께선 곧 얼굴을 펴시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며 부드럽게 수업을 마치셨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 우리들에게 해명해 주신 건 물론이고요.) 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주 한문 시간에도 선생님께서 한자어를 풀이하실 때 잠깐 실수를 하셨습니다. 그땐 제 짝지가 그걸 먼저 발견했지만 제가 질문 드리는 게 더 좋겠다고 해서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선 '와신상담' 사건이 있었던 그날부터 저를 기억하셨나 봅니다.


3월 마지막 주 금요일은 동아리 첫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한문 시간, 선생님께선 "여기 SFC(학생신앙운동) 든 사람 손들어 보세요" "YFC(십대선교회) 든 사람..." "Y-TEEN(YWCA의 학생부 기관) 든 사람..." (모두 기독교 동아리 이름임) 하나하나 물어보시고 수업을 하셨습니다. 저는 SFC 회원이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이랑 동아리 모임에 간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 저기 우리 한문 샘 아냐?" "맞는데!" 첫 모임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은 틀림없이 한문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날은 세 동아리 연합모임이었고, 선생님께선 원래 세 곳을 다 맡기로 하셨다가 4월부턴 YFC만 맡으시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선생님께서 쉬는 시간에 우리 반에 잠시 들러 저를 찾으셨습니다. "혜진이 무슨 써클인데?" "SFC 들었습니다." "그랬구나. 저번 수업 시간 때 YFC 든 사람 부를 때 손든 것 같아서 신입생 명단을 찾아봤더니, 아무리 봐도 없어서 뭔가 잘못되었는가 싶어 왔다." 선생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신다는 게 참 기뻤던 봄날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턴가, 선생님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어떻게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남자 친구나 좋아하는 선생님 드린다고 편지나 선물 만들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 쟤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저도 모르게 스승의 날 전날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편지를 썼습니다. 친구들을 만날수록 선생님 이야기를 점점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한문 시간만 되면 좀더 선생님의 눈에 들려고 자세를 바르게 했고, 선생님 시간표를 알고 나선 그 반 앞을 지나다가 우연인 척... 하고 인사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못 뵐 때가 더 많았지만요.


'사랑이야'는 1학기 마지막 한문 시간에 선생님께서 불러 주신 노래입니다. 처음 들어 보지만 영혼의 깊은 울림이 들어 있는 노래, 큰 서점 대중가요백과 책을 다 뒤져서야 그 노래가 '송창식의 사랑이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양희은 님 길보드(?) tape 속에서 그 노래를 찾아내고, 다시 송창식 님 길보드 tape에서 그 노래를 찾아내고... 제 마음과 참 많이 닮은 노래 앞에서 저는 선생님의 향기를 읽었고,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어느새 그 노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NO.2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제가 고 1 이니까 1993년이죠) KBS 열린음악회에 어쩌다 송창식 님이 나오시면, 앵콜 곡으로 꼭 그 노래를 불러 주시곤 했죠. 어떤 날은 선생님 댁에 전화 드려서 "선생님, 지금 열린음악회에 '사랑이야' 나오고 있어요!"라고 기별 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건 훨씬 뒷날, 여고 2학년 수학여행 전날의 이야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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