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신문지로 재단해서 풀 바를 시접부분을 조금씩 냄겨서 포개놓았던 신문모습이 떠오르고,그 옆에 졸음에 겨운 어머니 모습.
나가놀고 싶어서 떼쓰는 내 모습,묵묵히 풀칠하던 오빠 모습이 생각난다.
황해도 또순이 어머니가 현저동 산동네를 터전으로 잡은 이유는 순전히 사대문 안에있는 학교에 우리들을 보내기 위한 맹모의 맘 이었다는 걸,몇 년전에 박완서의'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중심지에 살 형편은 안되고 그 중 사대문과 가장 가까운곳.
어린 시절,산동네에서 물길러 다니면서 무악재 너머 홍제동만 가도 제법 괜찮은 곳에 살텐데 하면서 투덜거린적이 있었다.
박완서님도 순전히 황해도에서 서울 유학와서 사대문 안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현저동 산꼭대기에 살던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있었다.
주변에 미동,매동,수송,덕수,교동,재동 초등학교와
진명,이화,창덕,경기 ,경복, 서울,,배재,배화등 명문학교가 다 몰려있었기에
현저동 산동네에는 북청 물장수의 후예들도 많았고 울 엄마처럼 힘없는 사람은
신문 봉투를 만들어서 영천시장안에 있는 떡 시장에 파는 사람도 많았었다.
참을성 없는 나는 다 만든 봉투 수를 세고 백장씩 묶는 것도 지겨워서 몸살을 앓았고
끈기있게 봉투에 풀칠을 하던 오빠는 행여 엄마가 힘드실까봐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내게 나가놀다 오라고 하면
난 부리나케 인왕산이나,안산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산엔 정말 싱아가 지천으로 많아서 언제나 허기진 우린 소꿉도 살고 먹기도 했었다
인왕산 돌바위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엄마생각나서 집에 오면 아직 어머니는 오시지 않아
집은 컴컴했고 괜히 눈물이 핑 돌곤 했다.
옆집에 같이 잘 어울리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럴때면 꼭 대문옆에 나와서 같이 엄마를 기다려 주곤 했는데 그 때 불러주던 노래가 '섬집아기'였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몇 번이고 부르다가 싫증나면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를 부르기도 했다.
이화여고를 다니던 그 언니와 서울고를 다니던 울 오빠는 서로 좋아한것도 같고....
나중에 또순이 울엄마는 척박한 땅(배밭이나,땅콩밭이나 있을 정도의) 압구정동에 이사를 하는 재테크(?)로 강남에 입성도 하고....(그래봐야 고작 집한채건만)